1달러에 160엔을 넘나들던 시절, 저도 처음엔 이게 일시적인 현상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0년 만에 최고 기준금리를 올려도 엔화는 40년 만에 최저치를 찍었습니다. 금리를 올렸는데 통화는 더 떨어진다는 것, 이는 단순한 환율 문제가 아니라는 신호입니다. 대기업 자금 담당자로 일하며 직접 사무라이 채권을 발행해봤던 저로서는, 지금 일본이 처한 상황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엔화의 기축통화 배경
일본 여행때 환전 창구에서 100엔에 1,400원을 주고 바꿨는데, 지갑 속 현금이 순식간에 줄어드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도쿄 시내를 걷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서울 물가와 비교 계산이 돌아갔고, 꼭 필요한 지출 앞에서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경험이 있어서인지, 저는 기축통화(Key Currency)라는 개념을 조금 다르게 바라봅니다. 기축통화란 국가 간 거래와 외환 보유, 금융 계약의 기준이 되는 통화를 의미합니다. 달러나 유로는 해외에서 직접 결제 수단으로 쓰이지만, 엔화는 일본 바깥에서 결제 통화로 쓰인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수출 결제에서 엔화가 비중은 30% 초반, 수입은 20%대에 불과합니다. 일본 스스로도 국제 무역에서 엔화 의존도가 낮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엔화가 기축통화로 불린 진짜 이유는 안전 자산, 즉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신뢰였습니다.
20세기 후반 수십 년간 일본은 전 세계 최대 무역 흑자국으로 달러를 끌어모았고, 그 달러로 미국채를 가장 많이 사들였습니다. 대외 순자산 세계 1위, 외환 보유고 세계 2위라는 타이틀이 만든 신뢰가 엔화를 기축통화 반열에 올려놓은 핵심이었습니다.
엔캐리트레이드 청산과 사무라이 채권
자금 담당자로 일하던 시절, 사무라이 채권 발행은 매력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무라이 채권(Samurai Bond)이란 외국 기업이 일본 시장에서 엔화 표시로 발행하는 채권으로 일본의 초저금리를 활용해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는 창구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제로 금리 정책(Zero Interest Rate Policy, ZIRP)을 유지했는데, GDP 대비 200%를 넘는 국가채무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저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사무라이 채권이 각광받았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일본은행(BOJ)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엔캐리트레이드(Yen Carry Trade) 청산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엔캐리트레이드란 낮은 금리의 엔화를 빌려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인데, 금리가 오르면 이 포지션을 급히 청산하며 엔화 자산을 팔고 엔화를 되사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2024년 8월에 실제 청산으로 국내 증시가 단기 급락했던 것을 제 경험상 또렷이 기억합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일본 대외 자산의 상당 부분은 해외 공장이나 현지 법인 지분이라 위기 시 즉시 회수가 어렵습니다. 그나마 유동적인 미국채마저 매도하려 하면 미국 재무부가 곱게 볼 리 없어, 매도 압력을 자제해달라는 신호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대외 자산이 위기 방어용 실탄으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2025년 기준 일본의 무역 수지는 약 160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습니다(출처: 일본 재무성). 같은 기간 우리나라가 750억 달러 흑자를 낸 것과 비교하면, 무역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엔진이 이미 꺼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국가채무 200%가 주는 시사점
제가 이 상황을 보면서 가장 눈에 걸리는 숫자는 환율이 아닙니다. 2024년 6월 말 기준 일본의 국가채무는 1,346조 6,833억 엔으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GDP 대비 부채 비율이 200%를 넘어 선진국 중 독보적 1위입니다(출처: IMF). 나라가 1년에 버는 돈의 두 배를 빚으로 쌓아놓은 상태입니다.
이 부채 구조 때문에 일본은 오래도록 금리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금리가 오르면 국채 이자 부담이 불어나 재정 수지가 악화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엔화 약세를 막기 위해 결국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저는 이를 '부채 함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금리를 올리자니 이자 부담이 커지고, 안 올리자니 통화 가치가 무너지는 딜레마입니다.
일본 기준금리가 머지않아 1995년 이후 31년 만에 최고 수준인 1.25%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가 상승률이 아직 1.8% 수준이라도, 수십 년간 디플레이션에 익숙했던 일본 경제에는 상당한 압박입니다.
저금리 기조에 기대 해외 자금을 조달하거나, 외채 비중을 높여온 구조는 우리 기업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라이 채권 발행 업무를 하며 느낀 것은, 싼 이자의 매력은 분명하지만 통화 리스크와 금리 변동 리스크가 항상 따라붙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일본 경제는 그 리스크가 한꺼번에 터진 형태입니다.
결론
제가 직접 사무라이 채권을 발행했던 시절, 일본의 저금리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쌓은 무역 흑자와 대외 자산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지금 그 토대가 조금씩 균열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역 수지는 적자로 돌아섰고, 대외 자산은 마음대로 회수할 수 없으며, 국가채무는 GDP의 두 배를 넘어섰습니다.
엔화가 당장 기축통화 지위를 잃는다고 보기는 이릅니다. 하지만 '무조건 안전하다'는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시점입니다. 이 변화를 지켜보며 외채 의존도나 재정 건전성 문제가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엔화와 일본 금리 동향을 꾸준히 모니터링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준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