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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란 강원도 대관령 산골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건 197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한쪽에는 '도란스'라 부르던 묵직한 네모난 상자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릴 때는 그게 당연한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그 상자 하나 뒤에 나라 전체가 32년을 쏟아부은 거대한 결단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도란스 뒤에 숨은 32년짜리 국가사업
금성 흑백 TV를 켤 때면 먼저 도란스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아날로그 전압계 바늘이 개업식 허수아비처럼 좌우로 출렁이고, 고무 타는 냄새와 함께 상자 몸통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집집마다 하나씩 있던 물건이라 왜 필요한지 의문조차 품지 않았습니다.
그 상자의 정체는 전압 변환기, 즉 변압기였습니다. 여기서 변압기란 서로 다른 전압 규격 사이에서 전기를 안전하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바꿔주는 장치입니다. 당시 우리 집에 처음 공급되었던 전압은 110V였다가 얼마 후에 220V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220V로 바뀐 뒤에도 110V용 가전을 쓰려고 도란스가 필요했던 겁니다.
이 상황이 빚어진 배경에는 1968년 한만춘 박사의 논문 한 편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전기공학 박사 1호였던 그는 『과학과 기술』에 「배전 승압의 경제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논문의 핵심은 단순했습니다. 전압을 두 배로 올리면 전선을 흐르는 전류는 절반으로 줄고, 열로 새어나가는 송배전 손실은 4분의 1로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발전소를 새로 짓지 않고도 공급 능력을 두 배로 키울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1973년, 1인당 국민소득 400달러짜리 가난한 나라가 이 계산을 믿고 강원도 3천 가구를 첫 시작점으로 삼아 전국 승압 사업의 첫 삽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 삽질은 32년 동안 멈추지 않았습니다.
- 총 투자비: 1조 4천억 원
- 투입 인력: 연인원 757만 명
- 대상 가구: 전국 1,753만 가구
- 사업 기간: 1973년~2005년 (32년)
전압 하나가 가른 삼성·LG와 소니·샤프
2005년 11월,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전국 단일 전압 통일을 완료했습니다. 그 결과 송배전 손실률은 4.5%대로 떨어졌는데, 이는 세계 최저 수준에 해당합니다(출처: 한국전력공사). 매년 절약되는 전력량은 40억 kWh에 이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사업의 진짜 파급력은 전기 요금 절약이 아닌 다른 곳에서 터졌습니다. 바로 가전 산업이었습니다.
고전압 환경에서는 대전력 가전기기, 즉 에어컨·드럼 세탁기·대형 냉장고·인덕션처럼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제품을 훨씬 안정적으로 설계하고 검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전력 가전기기란 단순히 크기가 큰 제품이 아니라, 작동 중 순간 소비전력이 수 kW에 달해 낮은 전압에서는 전선 과열이나 차단기 트립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제품군을 말합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220V로 통일된 국내 시장에서 이런 제품들을 만들고 팔면서 기술력을 쌓았고, 그 경험이 해외 수출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결정적인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다수가 사는 유럽·중국·인도·동남아·중동·아프리카는 모두 220~230V 계열을 씁니다(출처: IEC(국제전기기술위원회)). 100V대를 쓰는 곳은 미국·캐나다·일본·대만 등 일부 나라입니다. 삼성과 LG는 국내 시장에서 쌓은 기술을 들고 세계 인구 다수가 사는 시장으로 곧장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의 소니·파나소닉·샤프는 달랐습니다. 국내용 100V 모델과 수출용 220V 모델을 따로 설계하고 검증하고 생산 라인을 이원화해야 했습니다. 이 추가 부담이 10년, 20년, 30년씩 쌓였습니다. 2011년 결산 기준으로 소니·파나소닉·샤프 세 회사의 합계 적자는 1조 6천억 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0조 원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창사 100년이 넘은 샤프는 대만 홍하이 그룹에 경영권을 통째로 넘겼습니다.
콘센트 결단,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전압 하나가 나라 산업의 방향을 바꿨다는 주장이 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그 이상입니다.
물론 일본 가전의 몰락을 220V 하나로만 설명하는 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두 배로 뛰면서 수출 경쟁력이 하루아침에 반토막 났고, 국내 시장에만 맞춘 제품 설계가 해외에서 통하지 않는 갈라파고스 증후군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란 태평양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물처럼 고립된 환경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하다 외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을 산업에 빗댄 표현입니다. 게다가 소니는 자사의 카세트 테이프 사업을 지키느라 디지털 음악 시장을 애플에게 고스란히 내줬습니다. 이 모든 요인이 겹쳤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만약 일본도 220V였다면, 적어도 대형 가전 분야에서만큼은 발판이 남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220V는 결정타가 아니라 위기 때 도망갈 공간을 만들어 두느냐, 아니냐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더 오래 생각하게 된 건 지금 이 시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가전제품 생산을 제한하고 집집마다 공사를 강제하며 32년을 밀어붙였습니다. 지금은 송전선로 하나를 놓는 데도 지역 갈등과 주민 합의로 십수 년이 걸립니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우리가 장기 결단을 내리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이터 센터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은 중소 도시 하나에 맞먹고, 전기차 급속 충전 인프라와 AI 연산 설비는 산업용 고전압 전력망 없이는 굴러가지 않습니다. 세계 최저 수준의 송배전 손실률을 이미 확보해 놓은 지금의 전력 인프라가 얼마나 큰 자산인지, 제 경험상 이건 숫자로 볼 때보다 실감이 훨씬 늦게 옵니다. 1968년 논문 한 줄에서 시작된 결단이 지금의 산업 경쟁력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가볍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벽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을 때마다, 그 안에는 32년을 버틴 결단이 들어 있습니다.
결론
제 고향 집 구석에 놓여 있던 도란스를 이제는 다르게 봅니다. 도란스가 사라지고 콘센트에 그냥 꽂으면 되는 지금, 그 뜨끈한 상자는 불편함의 상징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다음 세대를 위해 감수하기로 한 32년짜리 고통의 흔적이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 없이 30년을 버티는 결단은 지금 시대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송전선로 하나에도 수십 년이 걸리는 현실에서,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도란스'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지 묻게 됩니다. AI 데이터 센터, 전기차 충전 인프라, 차세대 전력망.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질문들이 1968년 논문 한 줄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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