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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루피아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대학원 시절,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공무원 분들의 기업 탐방을 인솔했던 일입니다. 육가공 공장의 위생 상태를 그토록 꼼꼼히 살피던 분들이 지금 이 뉴스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괜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루피아 하락의 배경에는 단기 악재만이 아니라 중장기 구조 문제가 겹쳐 있고, 그 파장은 동남아를 넘어 한국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루피아는 왜 흔들렸을까 — 단기 악재와 구조적 함정
저는 2010년 전후 쿠알라룸푸르에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는데, 당시 말레이시아 지인의 집에서 인도네시아 출신 세 분이 가사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이 고국의 통화 가치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루피아 급락 뉴스를 보니, 그 무게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루피아 하락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에너지 가격 급등입니다. 원유 순수입국인 인도네시아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올해 편성한 약 220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 보조금 예산이 빠르게 소진됐고, 외신은 추가로 최소 60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시장에서는 보조금 부담이 재정적자를 키우고, 이를 메우려는 국채 발행이 금리 상승과 외국인 자금 유출로 이어지면서 루피아가 크게 약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출처: 파이낸셜뉴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단기 악재보다 더 무서운 건 구조적 문제입니다. 인도네시아는 대표적인 니켈 수출국입니다. 니켈은 전기차 배터리와 스테인리스강의 원료인데, 나트륨이온 배터리처럼 니켈을 쓰지 않는 기술이 발전하면 주력 수출품의 수요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오랜 기간 중국 자본으로 원자재 산업 단지를 조성해 온 만큼, 중국 경기에 따라 수출 여건이 좌우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입니다.
또 하나, MSCI 신흥국 지수의 지위를 둘러싼 우려도 루피아를 누르고 있습니다. ETF처럼 지표를 따라 투자하는 패시브 자금은 이 지수로 신흥국 투자 비중을 정합니다. MSCI는 올해 1월 인도네시아 종목을 동결하며 강등 가능성을 경고했고, 5월에는 6개 종목을 제외한 데 이어 6월에는 심사를 11월까지 연장했습니다. 소유구조 불투명 등 시장 투명성이 이유였고, 6월 중순 기준 올해 외국인이 빼낸 주식 자금은 약 36억 5천만 달러입니다(출처: 로이터, Kontan). 강등이 결정되면 추종 자금이 자동으로 이탈할 수 있습니다.
국유화의 출구는 어디에 있나
경제가 흔들리면 정부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대개는 지갑을 열어 민심을 달래고, 동시에 자원 통제권을 쥐려 합니다. 프라보워 정부가 택한 방향은 자원 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 강화, 넓은 의미의 국유화입니다. 팜유·석탄·일부 광물의 수출을 국영 투자기관 다난타라 산하 회사로 모으겠다고 밝혔고, 허가가 취소된 광산을 넘겨받을 국영 광물 기업도 세웠습니다(출처: 이스트아시아포럼, 레푸블리카). 국유화란 민간 또는 외국 자본이 운영하던 기업이나 산업을 정부가 직접 소유·운영하는 정책을 말하는데, 이런 흐름은 외국인 투자자에게 "내가 투자한 자산도 통제될 수 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습니다.
국유화 전략이 효과를 내려면, 키운 기업을 적절한 시점에 민간에 이전하는 출구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이 정유·반도체·조선 분야에서 국가 주도 육성에 성공한 것은, 기업이 국유로 성장하는 동안에도 수출 실적이라는 시장의 냉정한 채점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재정을 복지에 먼저 쓰는 구조에서 기업을 키울 재원이 충분한지 의문입니다. 재정 준칙(Fiscal Rule)이란 정부가 쓸 수 있는 재정 적자의 상한선을 정해놓은 규범을 말합니다. 인도네시아에도 재정적자를 3% 이내로 유지하겠다는 약속이 있지만, 에너지 보조금과 무상급식 부담이 커지면서 이를 지킬 수 있을지가 시장의 관심사입니다(출처: 트레이딩이코노믹스, 파이낸셜뉴스). 준칙이 있어도 지출 압박이 이를 시험하면, 그 청구서는 결국 통화 가치 하락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루피아 약세를 키운 중요한 불씨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루피아의 흔들림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
국유화와 재정 문제는 인도네시아 안의 이야기지만, 그 여파는 국경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제가 인솔했던 인도네시아 공무원 분들이 육가공 공장의 규모와 위생 상태를 그토록 꼼꼼히 살피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더 짐작해 봅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식품 시장에서 할랄 인증 제도의 영향력이 큰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할랄 인증이란 도축·가공·성분 전 과정이 이슬람 율법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제도입니다. 중동 등 이슬람권 상당수 지역이 분쟁과 경제 불안에 휘말리면서 식품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상황에서 어디쯤 서 있을까요? 동남아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기술 우위보다 저원가 우위, 즉 저렴한 현지 인건비와 원자재, 유리한 물류 여건을 보고 나간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네시아 경제가 불안해진다고 해서 이 이점이 단기간에 국내로 대체되기는 어렵습니다. 화폐 가치의 불안정이 진짜 문제인 이유는 환차익이나 환차손이 아니라, 경제적 불확실성 자체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등 인도네시아산 원자재를 받아 공산품을 만들어온 인접국들도 같은 맥락에서 영향권 안에 있습니다. 아세안 내에서 인도네시아와 경쟁 관계에 있는 국가들은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 전에 공급망 재편이라는 진통을 먼저 겪어야 합니다.
결론
인솔했던 그날, 저는 인도네시아 공무원 분들이 왜 공장의 위생을 그토록 꼼꼼히 확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보니 그 꼼꼼함은 식품 분야에서 신뢰를 쌓으려는 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통화 가치도 그 신뢰처럼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재정 부담이 큰 복지 확대와 국유화가 동시에 걸리면 쌓아온 신뢰가 빠르게 소진될 수 있습니다. 국유화한 기업을 키워 민간에 넘기는 출구를 만들 수 있느냐, 복지와 산업 육성 사이에서 재원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느냐가 이 나라의 시험대이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산업화 경험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루피아 숫자 너머의 구조적 흐름을 함께 지켜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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