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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전쟁이 끝난 한반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67달러였습니다. 서방의 전문가들은 "100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못할 나라"라고 단언했죠. 그런데 70년 뒤 대한민국은 세계 12위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이라는 뉴스를 들으며 이유도 모르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감각이 지금도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수출 전략
가진 게 없다는 게 오히려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말, 처음 들으면 잘 납득이 안 되지 않으셨나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수출 품목 목록에는 가발, 돼지털, 다람쥐 가죽, 무연탄, 합판 같은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머리카락을 파는 나라였습니다. 반면 일본과 독일은 전쟁 전부터 쌓아온 산업 기반이 있었기에, 무너진 것을 복구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였습니다. 한국은 달랐습니다. 복구할 것 자체가 없었으니, 처음부터 세계가 원하는 것만 골라서 만들면 됐습니다.
1965년부터 정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열었습니다. 여기서 수출진흥확대회의란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며 기업별 수출 실적을 점검하고 목표 미달 시 그 이유를 보고받는 국가 차원의 수출 관리 체계입니다. 쉽게 말해 국가 전체가 수출이라는 목표 하나를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거예요. 그 결과 1962년 5천만 달러 남짓이던 수출액은 1970년 10억 달러를 넘겼고, 1977년에는 1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제가 라디오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바로 그 "수출 100억 달러"가 이렇게 만들어진 겁니다.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도 한국의 수출 주도 성장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로 평가해 왔습니다. 백지 위에 새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낡은 그림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빠를 수 있다는 사실,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로 증명해 보인 셈입니다.
사람이 자원이었던 나라, 인적자원의 힘
철광석도, 석유도 없는 나라가 어떻게 외화를 벌어올 수 있었을까요? 답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감수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1963년 겨울, 한국 청년들은 독일 루르 지방의 탄광 갱도로 향했습니다. 지하 1,000m, 섭씨 40도가 넘는 그 공간은 독일인들조차 기피하던 일자리였습니다. 그들이 그 어둡고 뜨거운 갱도에 스스로 들어간 이유는 단 하나, 국내 직장인 월급의 여덟 배에 달하는 임금이었습니다.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고국에 송금한 금액은 약 1억 달러에 이르렀고, 이 돈은 비료 공장과 기계 공장을 세우는 종잣돈이 됐습니다.
파독(派獨)이란 1960~70년대 정부 주도로 독일에 파견된 광부·간호사 인력 송출 사업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외화를 벌어온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독일의 기술과 근무 문화를 몸으로 익혀 귀국한 그분들은 이후 한국 산업 현장 곳곳에서 살아있는 기술 교관 역할을 했습니다. 이어서 베트남 파병, 중동 건설 붐으로 이어진 해외 인력 수출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외화를 국내로 끌어들였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저는 결혼 전이라 금이 없어 금 모으기 운동에 직접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장롱 깊숙이 넣어두셨던 반지와 목걸이를 꺼내 들고 지역 지자체로 달려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사태)란 1997년 국가 외환 보유고가 고갈되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사건으로, 당시 351만 명이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 227톤의 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 국민이 먼저 움직인 나라, 그게 대한민국이었습니다.
19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사람들로 불렸습니다. 저는 그 말이 칭찬인지 안타까움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노동이 강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자식을 가르치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절박함이 땀방울이 되어 국가의 자본으로 쌓였습니다.
소를 팔아 자식을 가르친 교육열이 만든 기적
1960년대 농촌에서 소를 팔고 논 한 뙈기를 팔아 자식을 도시 학교에 보낸 부모가 전국에 수백만 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 시절 교육열의 직접적인 수혜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6형제였는데, 부모님은 시골에서 자라던 저를 5학년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강릉으로 전학을 보내셨습니다. "큰 물에서 공부하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요. 그때부터 할머니와 같이 생활하며 공부를 이어갔는데, 제 경험상 그 결정이 제 인생 전체를 바꿔놓은 가장 큰 변곡점이었습니다. 대관령 시골에서 태어나 지금 호주에서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그 선택이 없었다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입니다.
교육열(敎育熱)이란 단순히 자녀를 학교에 보내려는 욕구가 아니라,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으려면 자식이 나보다 더 배워야 한다는 생존 전략에서 비롯된 집단적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가 개인을 넘어 마을 단위, 국가 단위로 조직화된 것이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입니다. 새마을운동이란 전국 3만여 개 마을의 지붕·길·우물을 정부 주도로 일괄 개선한 농촌 근대화 사업으로, 이후 수십 개 개발도상국이 빈곤 극복 모델로 배우러 올 만큼 국제적으로 주목받았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에 올랐고, 이공계 인력 배출 규모도 세계 최상위권이 됐습니다. 해외 언론과 학자들도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을 한국 경제의 핵심 원동력으로 꼽아 왔습니다. 해외에서 살아보니 많은 한국인들의 성실함과 근면성이 확실히 눈에 띄었고, 그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절박함이 만든 시스템은 늘 강하거든요.
결론
저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솔직히 좋지 않습니다. 기적이라는 단어는 그 뒤에 숨은 수백만 명의 땀과 결단을 한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으니까요. 독일 갱도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던 22살 청년들, 소를 팔아 자식 등록금을 마련한 부모들, 돌반지를 들고 은행 앞 줄에 선 어머니들. 그분들의 이야기는 기적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쌓인 선택의 총합입니다.
교육이 없었다면 제가 대관령 시골을 벗어나 호주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삶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주신 부모님의 선택이 결국 대한민국 성장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라는 걸,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성장 비결이 궁금하다면, 화려한 경제 통계보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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