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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인사과에서 급여 받을 계좌를 내라고 했습니다. 마침 회사 바로 옆에 한미은행이 있어서 별생각 없이 그곳에 급여 계좌를 만들었습니다. 그 뒤로 한미은행은 IMF를 지나며 다른 은행을 떠안았고, 몇 년 뒤에는 자신이 미국 씨티그룹에 팔려 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계좌는 33년이 지난 지금도 제 주거래 계좌입니다. 요즘 중국에서 은행이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를 보며 이 계좌가 떠올랐습니다. 간판이 내려갈 때 그 안의 예금과 빚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4년 만에 23%, 중국 은행 통폐합에 무슨 일이
파이낸셜타임스가 10월 3일 중국 국가금융감독관리총국(NFRA)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2025년 한 해에만 670곳이 넘는 은행 기관이 문을 닫거나 다른 은행에 흡수됐습니다. 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이 결과 중국의 은행 기관 수가 4년 만에 23% 줄어 3,139곳이 됐다고 분석했습니다(출처: Financial Times·Fitch 보도). 말 그대로 은행 네 곳 중 한 곳이 사라진 셈입니다.
사라진 곳은 대부분 농촌 지역의 작은 은행들입니다. 피치는 농촌·도시 단위의 소형 은행을 중국 은행 시스템에서 가장 약한 고리로 꼽았습니다. 자산 건전성이 나쁘고 자본이 부족하며, 지배구조에도 문제가 있다는 이유입니다. 작다고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 지역 은행이 가진 자산은 중국 전체 은행 자산의 4분의 1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중국 은행권 전체 자산은 약 64조 달러로 세계 최대입니다.
정리 방식도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3일 중국 당국은 후베이성의 민영은행인 우한중방은행을 1년간 직접 접수했고, 지방정부 소유의 한커우은행이 이 은행의 자산과 부채, 직원까지 넘겨받기로 했습니다(출처: Caixin Global). 2019년 내몽골 바오상은행 접수 이후 다시 등장한 강제 정리입니다.
간판은 내려도 부실 채무는 남는다
왜 하필 지금일까요. 뿌리는 2021년부터 이어진 부동산 침체입니다. 호황기 중국의 지방 은행들은 개발업체, 집을 사는 가계, 지방정부 관련 사업에 돈을 대며 함께 성장했습니다. 집값이 오른다는 전제 위에서 돌던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집값과 거래가 꺾이자 개발업체가 흔들리고, 땅을 팔아 살림하던 지방정부 재정도 무너졌습니다. 여기에 저금리와 디플레이션까지 겹쳐 은행은 떼일 돈은 늘고 버는 이자는 줄어드는 이중고에 빠졌습니다.
IMF도 이미 경고했습니다. 중국 금융부문 안정성 평가에서 금융 안정 위험이 2017년 평가 때보다 높아졌고 계속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특히 부동산과 지방정부 융자기구(LGFV) 부채를 핵심 위험으로 지목하며, 손실을 제때 투명하게 장부에 반영하라고 주문했습니다(출처: IMF).
여기서 핵심은 하나입니다. 은행을 합병하면 그 은행의 법인과 간판은 사라지지만, 대출과 부채는 인수한 은행의 장부로 옮겨갈 뿐입니다. 중방은행의 빚이 한커우은행으로 넘어간 것처럼요. 위험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 큰 그릇으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실제로 9월에는 중국 재무부가 농업은행, 공상은행 등 대형 국유 은행과 보험사 8곳에 약 540억 달러(3,600억 위안)의 자본을 넣겠다고 발표했습니다(출처: Nikkei Asia). 큰 그릇도 보강이 필요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겪어봤다, 1998년 한국의 은행 퇴출
한국은 이 길을 먼저 걸었습니다. 1998년 6월, 정부는 경기은행 등 은행 다섯 곳을 퇴출시켰고 부실 자산 13조 원은 성업공사(현 자산관리공사)로 따로 떼어냈습니다(출처: MBC 뉴스데스크). 그 뒷감당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168조 7,000억 원, 2026년 6월 말 기준 회수율은 아직 72.9%입니다(출처: 금융위원회 공적자금 운용현황). 마지막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받은 셈입니다.
경기은행을 넘겨받은 곳이 바로 제 급여 계좌가 있던 한미은행입니다. 한미은행은 2004년 씨티그룹에 인수돼 한국씨티은행이 됐고, 2022년부터는 개인 영업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씨티은행). 그래도 은행 코드는 한미은행의 027번이 이어지고 있고, 제 계좌는 33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았습니다. 간판은 바뀌어도 장부는 넘어간다는 것을 몸으로 겪은 셈입니다.
물론 통폐합 자체는 부실을 정리하는 정상적인 과정일 수 있습니다. 한국도 그 구조조정 덕분에 주요 은행들이 회복했습니다. 다만 중국은 중방은행처럼 부실 은행을 큰 은행에 통째로 넘기는 방식이 두드러져, 손실이 확정되지 않은 채 쌓일 수 있다는 점이 걱정입니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은행의 자본이 아니라 돈을 빌리려는 수요 자체가 약하다는 데 있어, 돈을 넣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결론
중국은 은행 간판을 빠르게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정 명령으로 간판은 없앨 수 있어도 빚까지 없앨 수는 없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부실의 소멸이 아니라 부실의 이동에 가깝습니다. 작은 은행에서 지역 은행으로, 지역 은행에서 국유 은행으로, 그리고 결국 국가 재정으로요.
한국은 그 마지막 청구서를 국민 세금으로 받았습니다. 중국의 청구서가 어디에 도착할지는 아직 모릅니다. 다만 중국은 한국과 호주 모두에게 가장 큰 교역 상대인 만큼, 그 청구서의 무게는 우리 수출과 지갑에도 조금씩 전해질 수 있습니다. 은행 숫자보다 그 빚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고: China shutters nearly 25% of its banks (PYMNTS, FT·Fitch 보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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